벚꽃 흩날리는 고도에서: 경주, 그 천년의 시간을 거닐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볼을 스치는 3월의 어느 날, 나는 경주로 향했다. 겨울의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은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포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 천년의 시간이 녹아내린 고도의 봄을 만나기 위해.

이미지 출처 : 경주시 시정뉴스
시간의 문턱에서
첫날 아침, 불국사로 향하는 길은 고요했다. 맑은 하늘과 불국사의 석축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그 묘한 적막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었을까. 고개를 들어 보니 돌기둥 사이로 노란 산수유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깊은 향기를 내뿜는 그 꽃들 사이로 천년의 불교 철학이 숨 쉬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되, 이곳에서만은 그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하다."
산사의 고요함은 도시의 번잡함에 지친 내 마음을 다독였다. 절 마당에 홀로 앉아 한동안 봄 햇살을 맞으며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천 년 전에도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때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같을까.

이미지 출처 : 산들산들 바람따라
달콤한 호흡의 시간
불국사를 뒤로하고 찾은 곳은 황남빵 가게였다. 오래된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달콤한 팥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주문한 따끈한 황남빵 한 봉지를 들고 나와 근처 한옥 카페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처마 아래 자리를 잡고, 바삭한 황남빵 한 입과 함께 진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삼켰다.
창밖으로는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미소 속에서 여행의 설렘을 읽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카페는 특별하다. 일상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갈 순간들이 여행지에서는 모두 소중한 기억이 되어 남는다.

이미지출처: 한국일보
벚꽃비가 내리는 대릉원
오후의 대릉원은 봄의 전령사 벚꽃들로 가득했다. 둥근 언덕처럼 솟아오른 고분들 사이로 늘어선 벚나무들은 분홍빛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게로 날아왔다.
잠시 벤치에 앉아 옆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친구들은 함께 사진을 찍으며, 가족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봄날의 설렘이 묻어났다.
"벚꽃이 흩날리는 고분 사이를 걸으며 생각했다. 천 년 전 신라인들도 이렇게 봄을 맞이했을까."
시간은 흘러도 자연의 순환은 변함없다. 봄은 항상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위로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 경주문화관광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황리단길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무렵, 황리단길에 들어섰다. 돌담과 기와지붕 사이로 트렌디한 간판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고즈넉한 한옥과 현대적인 디자인의 조화가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는 이곳은 경주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들어간 '교동카페'는 한옥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었다.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전통차 한 잔을 주문했다. 오미자차의 달콤새콤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찻잔 너머로 보이는 마당의 매화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생각해보면 이 도시는 유독 시간의 층위가 두꺼운 곳이다. 천 년 전 신라의 숨결과 현대적인 감성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 그 사이에서 나는 시간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미지출처: 매일신문
별을 관측하던 자리에서
첨성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비춘 첨성대는 낮과는 또 다른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별을 보기 위해 세워진 이 고대의 건축물 앞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천 년 전 신라인들은 이곳에서 얼마나 선명한 별들을 보았을까 상상해 보았다.
첨성대 주변으로 피어난 벚꽃나무들은 야간 조명을 받아 더욱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흩날렸고, 그 광경은 마치 별들이 땅으로 내려온 듯했다.

이미지출처: 동국인
호수에 비친 아침
둘째 날 아침, 보문호수 근처의 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호수는 잔잔했고, 물 위로 비친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브런치를 먹으며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멀리 수변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자전거를 빌려 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페달을 밟으며 느끼는 봄바람은 상쾌했다. 호수 주변으로 피어난 벚꽃나무들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봄의 기운은 충분히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모든 걱정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직 현재의 순간만을 느끼려 노력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후의 상쾌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가벼운 땀방울이 이마에 맺혔고, 그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증표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인사
경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선택한 것은 납작만두였다. 길거리 음식이지만 그 맛은 어떤 고급 요리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바삭하게 구워진 만두피와 매콤한 양념장의 조화는 절묘했다. 마지막 한 조각을 먹으며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천 년의 역사가 숨 쉬는 이 도시는 내게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옛것과 새것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봄이 주는 새로운 시작의 기운.
경주를 떠나는 길,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벚꽃 한 장이 내 손에 앉았다. 그것은 마치 경주가 내게 건네는 작별 인사 같았다. 나는 그 꽃잎을 조심스럽게 책갈피 사이에 넣었다. 언젠가 일상에 지칠 때, 이 꽃잎을 보며 경주의 봄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봄날의 경주는 내 마음 속에 벚꽃 한 장을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 꽃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안에서 피어날 것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고도에서의 이틀은 짧았지만,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을 것이다. 3월의 경주가 당신에게도 특별한 봄날의 추억을 선물해 주길 바란다. 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그곳에서, 당신만의 감성적인 여행이 시작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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